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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실천말씀

총공회와 백영희목사님의 생애 > 백영희 목사님 생애 이전으로

1988.03.23. 수야   요한계시록 17:14(2)

그 뭐 6·25때도 인민군들 그렇츰 그래 쌓지만 우리는 하루 세 번씩 예배 봤어. 다 모두 도망 다 갔는데 하루 세 번씩 예배 보니까 그 사람들이 있다가 저놈들 우리 망하라고 하루 세 번씩 예배보고 기도한다고 항상 오늘 죽이니 내일 죽이니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지 안하니까 안 죽고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때 그렇게 볶아대도 예배 한 번도 설교 안 해 본 일 없어. 새벽 설교 안 한 날이 없었고 또 대예배 때 설교 안 한 일 없었고 주일 범한 일 없었고 하나님이 도우지 안하면 그리 못 해요. 그거 됩니까? 기도한 덕인데,

1988.03.23. 수야   요한계시록 17:14(1)

기도하고 이라니까 그 부장이, 일본 부장이 와 가지고서 우리 집에 매일 옵니다. 매일 와 가지고 ‘어짭니까?’ ‘나는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된다 하면 그럴 건데 그거 왜 그거 가지고 고만 가고, 싱강 안 해도, 그 뭐 독한 사람은 다 유명한 사람은 올려 보내도 저한테 와 가지고는 말을 못 하고 그만 그라고만 가 버리고 이래 가지고서, 나뿐 아니라 거게 개명교회 있는 사람들 신사참배 하나도 안했습니다. 여기 ○○○집사도 여기 와 앉았을 터인데 그분도 신사참배 하나도 안 했습니다.

1988.03.23. 수야   요한계시록 17:14

제가 체험한 대로는 과거에 제가 부산 오기 전에 저 고제면에서 왜정 말년 그 신사참배도, 그때 신사참배 때도 지냈고 또 공산주의로 6·25때도 지냈는데 그때는 저를 기도의 사람이라고, 그래 내가 그렇게 하지는 못했는데. 경상남도에서는 제일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유명했었습니다. 저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다 알고. 산기도 많이 하는 사람 금식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 또 그 사람 집회는 가면 모두가 다 진동이 돼 가지고서 막 사람들이 변화가 된다, 그런 소문이 난 ‘경남은 진동파라’ 하는 것이 바로 제가 시작한 것입니다. 또 ‘경북은 성경이요 경남은 기도라’ 경남은 기도를 힘쓰고 경북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 하는데 경남에 기도 힘쓴다는 그 기도에 힘쓴다는 것이 바로 제가 시발이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도 안했는데 유명하기는 했습니다. 이러니까 저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또 밤마다 그래 가지만 안하고 그저 자주, 한 달에 몇 번이나 했는지 그거는 세어 보지는 안했지만 고만 기도하러 간다 하면 우 보따리 울러 메고 이고 나서면 저게 뭐 산에 어디 가 가지고서 가면 비가 오니까 이 풀을 베어서 움막을 해 놓고서 그래 놓고 거기서 그저 닷새고 엿새고 금식 기도하고 이와 같이 하다가서 또 기어내려 오고 참 별스럽게 믿었습니다. 별스럽게 믿었소. 아주 특수하게 믿었소. 요새 믿는 거 보면 다, 시시해. 그러니까 제가 왜정 말년 때도, 해방되는 그 팔월 십오일 날도 저 덕유산이라는 그 덕유산 상봉에 가 가지고서 거게서 기도하다가 이제 사람들이 와 가지고서 해방됐다 해서 내려왔었습니다. 언제든지 기도에 있었습니다.

1987.10.05. 월새   요한계시록 2:2-5(1)

또 6·25가 나고 난 다음에 제가 있다 나온 개명교회, 제가 시무하던 그 봉산교회 제가 지금 이전해 가지고 있는 위천교회, 위천교회 있을 때에 그 군내에서 셋 교회는 공산주의 그 점령 안에서도 매일 죽인다 소리를 늘 계속 들으면서도 하루 세 번씩 종치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둘은 예배드리다가 나중에 가서 정상적으로 대예배 보고 새벽기도 보고 이것만 보고 위천교회는 두 달 동안, 6·25 전쟁 난 후에 두 달 동안 계속해서 대집회를 계속해서 했었습니다.

1987.10.05. 월새   요한계시록 2:2-5

이래 가지고 나왔는데 하나님이 나를 거기서 제명시켰어. 내가 그때 예배당 소송 문제니, 또 신신학 문제니, 이 모든 교리 문제니, 고려신학교의 정치학을 송상석 목사님이 가르쳤기 때문에 ‘송상석 목사님은 세상 정치가지 성경 정치가 아닌데 어찌 시켰느냐?’ 고려신학교에 대한 거 뭐 이런 것, 또 유엔군 철퇴하고 난 다음에 그때 모두 전국 교회가 다 혈서를 써 가지고 메시지 내고 시가행렬을 하고서 한 거 이런 것, 또 이 I·C·C·C의 박사 학위를 받아 가지고 온 이런 것 뭐 이런 것을 백지 말했다 말이오.

1987.10.04. 주후   요한계시록 2:4-7(1)

제가 그래도 거창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사람 없는 한적한 산이나 그 첩첩산중이나 사람들이 낮에도 무서워서 못 간다는 그런 데 가 가지고서 가서 있기를 좋아했고, 또 밤이면 개울가나 산이나 언제든지 한적한 곳을 좋아하고 길을 가도 언제든지 주님과 같이 동행했고 이렇게 하던 이 주의 사랑, 참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구원만 보고 사는 그 생활이 되었었는데 부산 오고 난 다음에 완전히 변해졌어. 이래 가지고 그거 하던 흔적을 그 형태는 가져서 제 오고 난 다음에 삼 년 동안은 한 번도 방 안에서 누워 잔적은 없었고 대님을, 한복 입었으니까 대님 끄른 적도 없었고 대개는 또 제가 산에 가니까 모두 권찰님들도 다 보따리 싸 이고 다 산에 가서 산에 가 가지고서 밤에 저녁 먹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또 새벽에 내려와 가지고 새벽기도 하고,

1987.10.04. 주후   요한계시록 2:4-7

제가 거창서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나서 삼 년 동안 콩잎파리죽 먹었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어째 됐는지 어데서 돈이 오는지 모르게 어찌 됐든지 그 골짝에는 제일 부자가 됐던 것입니다. 제일 부자가 됐어. 어데서 돈이 오는지 몰라. 나는 돈벌이 하지 안했어. 나는 일주일 동안에 월요일 날 하루만 집에 일하고 나머지기는 내나 복음 위해서 살았고, 그다음에 나중에는 전도사 되기 전에 한 달 동안에 세 주일은 다른 지방 교회 가서 내나 가서 전도하고 심방하고 설교해 주고 한 주간만 내 본 교회 있었었어. 이래서 어데서 왔는지 하나님이 축복 주시니까 그래. 그거 다 나중에 교역자로 나오면서, 유급의 전도사로 나오면서 다 털어서 없애버리고 빈손 들고 나왔습니다.

1985.12.28. 토새   요한계시록 3:1~6

인제 죽었다 하고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고서 갔는데 또 살고 살고 이래서, 그 죽음을, 죽음 속에서 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걸 느껴서 이거 뭐 사자 구덩이에서 산 것이나 또 불 가운데서 산 것이나 다를 게 뭐 있겠느냐 그걸 자꾸 그래 느끼면서 뭐 할라고 이랬는가 이랬는데 지금 내게 필요해. 지금 내가 이렇게 그걸 생각하니까 나에게 힘이 나옵니다.

1989.08.09. 수후   요한계시록 2:8-11(2)

이래 가지고 그러니까 그런 줄은 모르고 나를 독실한 예수 믿는 신자라 하니까 공연히 나를 어만되게 공산주의자라고, 나를 뺄갱이라고 이래 주 몰아 가지고 뺄갱이 토벌대가, 뺄갱이가 토벌대에 들어와서, 열다섯 명이 들어와 가지고 그것이 몽땅 고제면으로 와 가지고 그게 지금 이제 공산주의 토벌한다 하는 것이 지금 참된 신자 토벌하는 거라. 민주주의 토벌하는 거라. 그래 가지고 그들이 와서 뭐 내게 대해서 굉장한 박해를 하고 많은 그때 내가 구타를 해 받았습니다. 많이 맞았지마는, 이상해요. 하나님이 대신 맞아 주니까 아프지 안 해. 모두 사람이 말하기를 ‘저거 죽었다. 저거는 저거 뭐 이제는 저렇츰 사람이 맞고야 안 죽을 수가 있는가?’ 해 ‘죽었다.’ 하는데, 몽둥이가 여러 이런 몽둥이가 여러 개 뿔라지니까 죽었다 이래 하는데 나는 어짠지 뭐 그래 하는데 자꾸 내가 대항해 싸울 수는 없고 맞고 있는데 아프지 안 해. 그래 다 때리고 난 다음에 ‘이제는 죽었으니까 이거 그만 가자.’ 하면서 저거끼리 가요.

1989.08.09. 수후   요한계시록 2:8-11(1)

제가 그때 여기 개명에서, 그때 왜정 때가 아니고 해방 후에 제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공화국을 건국할라고 그때 발기회 모운다고 이래서 거창 군내가 전부 발기회, 인민공화국 발기회 전부 동참 다 했어요. 안 한 면이 하나도 없었어. 고제면만큼은 못했어. 고제면은 그들이 하러 왔다가 ‘나는 인민공화국에는 내가 줄 수가 없다. 이거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런 정치에 주지 하나님 부정하는 정치에 안 주겠다.’고 이러니까 그들이 하다가 안 되니까 나를 총을 대고 ‘이놈의 새끼, 너 그러면 죽어도 좋으냐?’ ‘죽어도 괜찮다. 너거가 나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 나는 그거 못하겠다.’ 이래 가지고 오만 게 다 됐는데 나 한 사람이 반대해 가지고 인민공화국 발기회를 고제면만은 못하고 갔습니다. 요게 적혀 가지고 위로 올라가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그다음에 6·25 때에, 6·25 때 그 사람들이 여게 백영기를 찾았는데 백영기가 있어야지? 내가 영희인데 영기라고 이래 적었어요. 그 백영기 찾아서 양 사방 교회 다녀야 백영기가 있어야지? 하나님이 그 이름을 똑 틀리게 해 가지고 그래 찾아다니다가 그것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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