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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AIK YOUNGHUI 백영희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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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희 목사님

백영희 목사님

백영희 목사님 1910.07.29~1989.08.27

부산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동안, 백영희 목사님의 거처는 예배당 건물 맨 위층의 아담한 옥탑방이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항상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시다가 뒤늦게 예배당에서 나오셨던 목사님께서는 옥상으로 이어진 그 수많은 계단을 앞에 두고 잠깐 걸음을 멈추시곤 하셨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세계 최대 주일학교로 만들고, 교인 수 십만 명이 넘는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 교단을 창립하신 혁혁한 공로 앞에서도, 백영희 목사님은 한번도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이 계단을 오르며 자신을 미약한 종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시대, 6.25 동란기에 목회를 하시며 부닥쳤던 그 수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로 삼으셨던 백영희 목사님은 일주일에 10번 이상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그날까지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가사 평소 그토록 소원하셨던 순교를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순교하신 당일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 복음을 받고 조사님으로 목회 활동을 하실 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방요배, 일장기 게양,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믿고 계명을 지키려는 믿음 하나만으로 일제의 온갖 위협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6.25때 북한 역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학살, 체포, 구금, 고문, 인민 재판 등 갖은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공산치하 속에서도 백영희 목사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인민군들이 예배당으로 찾아와 백영희 목사님을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깊은 산골짝으로 데려 가 구덩이를 파라 하고서는 죽여서 그 구덩이에 묻어 버리는 일이 흔했던 때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을 전도하던 목사님을 한 인민군이 저런 악질은 자기가 처단해야 한다며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목사님께 그 인민군이 한 말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가시이소, 저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어쨌든지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죽음, 절망, 비극이 점철된 6.25는 백목사님에겐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 부산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것은 1952년부터였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자주 강단에서 부산에 오신 이후로 신앙이 많이 약해졌다고 고백하시곤 했습니다. 일제시대, 6.25 동란 때 항상 산과 들,강가를 찾아 한번 무릎을 꿇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꼼짝 않고 기도했던 그 기도 생활,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냈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 오신 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을 발판 삼아 세계가 깜짝 놀랄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교단을 창립하시고 120여 교회를 개척하셨을 뿐만 아니라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로 성장시키셨습니다. 년 2회 대구와 거창에서 열리는 집회에는 20,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했으며, 목회연구소를 통해서 [목회설교록]도 출간했습니다.

순교 전날,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욕실에 있던 비누를 구석구석 치우시며...

“이제 이거 필요 없다”고 하시고는, 조용히 마지막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그러셨듯 그 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셔서 고요한 새벽공기를 가르시며 계단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예배당을 향해 한걸음한걸음 내려가셨습니다. 새벽기도가 시작되기 전, 강단에 앉아, 마치 눈으로 작별 인사를 하시듯 고개를 돌려 교인들을 하나하나 살피셨습니다. 누가 왔는지, 누가 빠졌는지, 맨날 늦잠 자던 그 집사님이 또 늦잠 자지는 않았는지…… 설교 도중, 갑자기 고무신을 신은 한 남자가 강대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품 안에 숨겨 둔 칼을 뽑아 백영희 목사님을 공격했습니다. 7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제시대와 6.25 동란을 거쳐 서부교회에서 목회 생활하시면서 부닥쳤던 수많은 현실들이 백영희 목사님의 눈앞에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나는 순교한다…… 한 교인의 등에 엎혀 나가시며 백영희 목사님은 고개를 돌려 교인들에게 당부 하셨습니다. “조용히 기도해……” 하지만, 예배당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백영희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평소 한산했던 그 옥탑방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 와 대신동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목사님이 매일 오르내리시던 그 계단, 서부교회 건물 주변 그리고 도로에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 서서, 울며 통곡하며 목사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천국에서 만납시다!” 교인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신 백영희 목사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발자취, 그분이 남기신 설교 말씀과 교훈은 등불이 되어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갈 길을 찾아 헤매는 많은 사람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출생 및 성장과정

1910년 7월 경남 거창군 주상면 도평리 출생 ( 7남매 중 차남 )

1920년 7월 웅양공립보통학교 입학 ( 경제문제로 보통학교 5학년때 자퇴 )

1921년 등교길에 고운서 목사의 전도 ( 중생됨 )

1926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감 ( 공장, 탄광 등에서 각종 사회경험 )

1928년 11월 귀국. 12월 이경순 사모님과 결혼

1929년 9월 탁주제조업, 한지제조업 한약방을 차려 무료로 면민 환자들 치료. 과수농산물의 품종을 개량하여 수확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보급.

백영희 목사님

백영희 목사님

신앙생활

1936년 6월 아내 이경순사모님, 농산교회 먼저 출석시킴

1936년 7월 농산교회 처음 출석. 안식교 2주 나감

1936년 8월 황보기장로님 말씀에서 은혜 받음 (3일 만에 술도가 처분, 4일만에 금연, 채무증서 불태움, 모든 재산을 고아원ㆍ양로원ㆍ성서공회에 보냄 )

1937년 1월 세례

1938년 1월 진주성경학교 본과 1학년 수료

목회생활

1. 개명교회

1939년 개명교회 목회시작, 일제시대에 교회전체가 신사참배 환난 통과

1944년 총독부의 예배당 합동령에도 대낮 예배

1945년 4월 8월에 우리나라가 해방됨을 덕유산 기도 중에 미리 아심

1946년 4월 새벽기도회를 새벽예배로 정식 출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 개교, 1회 입학

1948년 1월 전도사 인허 ( 주남선 목사님 )

1939년~1949년 5월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동교회, 웅양교회를 무급으로 시무

2. 위천교회

1949년 5월 위천교회 유급 전도사로 부임

1950년 3월 국기배례거부, 주일학생 신앙승리

1950년 4월 국무회의에서 “국기배례”가 “국기에 대하여 주목”으로 변경 발표

21950년 6월 고려신학교 재입학

6ㆍ25 전쟁중 인민군 점령지 속에서 두 달 동안 하루 세 번씩 종치고 예배드림

3. 서부교회

1952년 7월 서부교회 부임 ( 3년동안 철야기도 )

1954년 6월 고려신학교 제8회 졸업

1957년 고신 강도사 시취시험 합격, 삼봉산 집회 시작

1957년 12월 “고신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삭발

1958년 금정산 집회 시작

1959년 4월 고신교단 강도사 해임 통고

1959년 6월 시무해임 통고

1959년 9월 고신교단 “상회불복종”으로 제명, 개교회로 출발

1960년 11월 목사 안수 받음

1966년 5월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로 출발

1967년 거창집회로 변경해서 계속함

1969년 대구집회로 변경해서 계속함

1976년 3월 목회자 양성원 설립

1979년 2월 유년 주일학교 취재보도로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로 알려짐 (매주일학생 8,000여명 출석, 초교파 1,130여 교회 견학→ 세계주일학교 부흥에 큰 역할 )

1982년 3월 편집실(현 목회연구소) 발족

~1989년 120여개 개척교회 설립, 매년 대구ㆍ거창 산상집회에 2만여 명 참석, 설교록 182호까지 출간

순교

1989년 8월27일 새벽예배 설교도중 강단에서 순교

백영희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