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백영희 목사님 > 백영희 목사님 소개
예배가 끝난 후에도 항상 늦게까지 남아 기도하시다가 뒤늦게 예배당에서 나오셨던 목사님께서는 옥상으로 이어진 그 수많은 계단을 앞에 두고 잠깐 걸음을 멈추시곤 하셨습니다.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세계 최대 주일학교로 만들고, 교인 수 십만 명이 넘는 예수교장로회 한국총공회 교단을 창립하신 혁혁한 공로 앞에서도, 백영희 목사님은 한번도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이 계단을 오르며 자신을 미약한 종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일제시대, 6.25 동란기에 목회를 하시며 부닥쳤던 그 수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로 삼으셨던 백영희 목사님은 일주일에 10번 이상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그날까지 점점 하나님께 가까이 가사 평소 그토록 소원하셨던 순교를 하셨습니다.
젊은 시절, 복음을 받고 조사님으로 목회 활동을 하실 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방요배, 일장기 게양,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며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믿고 계명을 지키려는 믿음 하나만으로 일제의 온갖 위협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6.25때 북한 역시 기독교를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학살, 체포, 구금, 고문, 인민 재판 등 갖은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였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공산치하 속에서도 백영희 목사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인도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인민군들이 예배당으로 찾아와 백영희 목사님을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깊은 산골짝으로 데려 가 구덩이를 파라 하고서는 죽여서 그 구덩이에 묻어 버리는 일이 흔했던 때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을 전도하던 목사님을 한 인민군이 저런 악질은 자기가 처단해야 한다며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목사님께 그 인민군이 한 말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가시이소, 저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어쨌든지 순수한 예수를 믿으십시오.” 죽음, 절망, 비극이 점철된 6.25는 백목사님에겐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 부산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것은 1952년부터였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서는 자주 강단에서 부산에 오신 이후로 신앙이 많이 약해졌다고 고백하시곤 했습니다. 일제시대, 6.25 동란 때 항상 산과 들,강가를 찾아 한번 무릎을 꿇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꼼짝 않고 기도했던 그 기도 생활,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냈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부산에 오신 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을 발판 삼아 세계가 깜짝 놀랄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교단을 창립하시고 120여 교회를 개척하셨을 뿐만 아니라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로 성장시키셨습니다. 년 2회 대구와 거창에서 열리는 집회에는 20,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참석했으며, 목회연구소를 통해서 [목회설교록]도 출간했습니다.
“이제 이거 필요 없다”고 하시고는, 조용히 마지막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30년 동안 그러셨듯 그 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셔서 고요한 새벽공기를 가르시며 계단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예배당을 향해 한걸음한걸음 내려가셨습니다. 새벽기도가 시작되기 전, 강단에 앉아, 마치 눈으로 작별 인사를 하시듯 고개를 돌려 교인들을 하나하나 살피셨습니다. 누가 왔는지, 누가 빠졌는지, 맨날 늦잠 자던 그 집사님이 또 늦잠 자지는 않았는지…… 설교 도중, 갑자기 고무신을 신은 한 남자가 강대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품 안에 숨겨 둔 칼을 뽑아 백영희 목사님을 공격했습니다. 7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일제시대와 6.25 동란을 거쳐 서부교회에서 목회 생활하시면서 부닥쳤던 수많은 현실들이 백영희 목사님의 눈앞에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나는 순교한다…… 한 교인의 등에 엎혀 나가시며 백영희 목사님은 고개를 돌려 교인들에게 당부 하셨습니다. “조용히 기도해……” 하지만, 예배당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백영희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도 평소 한산했던 그 옥탑방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백영희 목사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 와 대신동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목사님이 매일 오르내리시던 그 계단, 서부교회 건물 주변 그리고 도로에까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 서서, 울며 통곡하며 목사님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천국에서 만납시다!” 교인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인생의 갈 길을 다 달리신 백영희 목사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발자취, 그분이 남기신 설교 말씀과 교훈은 등불이 되어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갈 길을 찾아 헤매는 많은 사람들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